질문은 간단하다. ‘왜 예술을 하는가.’ 완전한 답이 불가능한 질문은 무게도 책임도 갖지 않는다. 아니, 질문은 불가능한 답을 예비한 가운데 많은 맥락과 정동을 예비한다. 누구라도 위의 질문이 향할 것이고, 정답을 얘기하지 못할지언정 최소한 육하원칙의 항목을 동반한 설명들이 구구절절 이어질 것이다. ‘왜’가 아닌 어떻게, 언제와 무엇이 붙은 질문은 정답을 우회한 보다 많은 모티프를 열어둔다. 정답이 부재한 자리엔 셀 수 없는 설명들이 넘친다. 범위를 좁히고 세목을 정해 이야기한다면 서술 가능한 의미들이 타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가령 질문에 당연시된 예술은 어떤 사조와 세계관에 여과된 개념인가. 예술의 모티프를 묻는 대상이 청년작가를 향하는 데에는 어떤 배경이 있는가. 청년의 당사자성뿐 아니라 시기적 불안정과 가능성 따위의 세속적 의미를 염두에 둔다면 청년은 예술에 어떻게 접목되는가. 그 모습은 어떠한가. 청년작가의 호명이 아직 유효하다면, 이들은 어째서 아직도 청년으로 호명되고 있는가.
모티프는 통시적이고 개별적인 동시에 공시적이고 보편적이다. 시대를 관통하는 작업의 동기는 근원적이고 추상적일 테지만, 동시대 작가들로 한정하면 작업의 관점, 사회 맥락과 사건, 이론, 개인사 등 낮은 포복으로 편재해 있던 질문들이 덤벼들 것이다. 모티프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에 실마리를 던지거나, 근본적인 질문으로부터 동시대 예술을 이야기할 수 있는 폭을 확장한다.
『한계를 절개하는 우로보로스의 산책자들』 中 발췌
남웅 l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