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돌은 존재의 조건이다. 우리는 세계에 시달린다. 동시에 세계의 음덕으로 살아간다. 빛은 그늘과 어둠 때문에 본질을 드러낸다. 우리는 태양 가까이서 빛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여름날 쨍쨍한 태양의 작열보다도 동굴에 스며든 빛에서 그것의 위대함이 느껴진다. 모든 것은 대대적 관계이지만, 그 속에서 진정한 조화의 묘를 얻게 되는 것이다. 김영헌(金永憲, 1964-)의 회화세계도 그와 같다. 작가는 상반된 색의 충돌, 형의 구축과 형의 해체, 진동과 리듬, 수렴하는 상(象)과 확산하는 에너지를 대결시켜 믿기 힘든 회화적 에너지를 한 화면에 쏟아낸다. 그가 그리는 모든 회화작품에 불가사의한 생명력과 힘이 분출한다.
작가는 화면에서 상반된 색을 충돌시키면서 형상을 구축함과 동시에 해체한다. 구축된 형상을 다시 지우고 덧씌우고 가르고 베며 모호한 블러링으로 새로운 공간을 산생(産生)시키다 이내 다시 접는다. 그리고 이러한 회화의 제스처를 무수히 반복하면서 놀라운 화면을 잉태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사는 현상계는 펼쳐짐과 접힘의 간단(間斷) 없는 흐름이기 때문이다. 가장 추상적인 작가의 회화세계는 물리계의 진실과 닮아있다. 더욱이 작가가 산생하는 진동과 리듬, 수렴하는 상(象), 그리고 무한히 확산하는 에너지의 대조는 새로운 회화의 경지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창신(創新)의 열정과 이지적 사변의 합일」 中 발췌 | 이진명(미술비평ㆍ철학박사)
우리는 끊임없이 일렁이는 파동 속에 살고 있다. 브라운관 티브이의 주사선, 레코드판에 새겨진 소릿골, 바람 소리와 물결, 첼로의 아다지오, 휘어진 공간과 시간, 쿼크와 쿼크의 틈, 은하의 소용돌이, 제임스 웹이 바라본 우주, 디지털 가상 공간 속의 삶…….
나의 작업 역시 21세기 문명의 발전과 함께 진화하는 중이다. 새로움은 그 균열 속에서 잉태된다. 마치 벌어진 콘크리트 틈에서 새싹이 자라듯.
내 회화의 표면에 보이는 색 면, 형광색과 절단된 화면 구성 방법 등을 디지털적 속성이라고 한다면, 혁필 줄무늬와 뿌려진 물감 자국, 팔레트 나이프 자국, 기하학적 선과 스크래치 등은 아날로그적인 속성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날로그의 연속성과 디지털의 비연속성, 기하학적 파형과 자유 파형, 다채로운 이질적 회화 요소들이 화면 안에 공존하거나 대립하며 회화적 상상력을 생성시킨다. 최근 나의 회화는 이렇게 회화적 요소들 사이의 틈을 오가며 추상적 상상을 발굴하는 여행이다.
「김영헌 작가 노트; 생각의 파편들」 中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