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장섭에게 자연은 민중의 삶과 역사와 분리되어 나타나지 않는다. 이 둘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손장섭의 2000년대 작품은 중요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1980년대에 자연은 민중의 삶의 터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과 민중은 서로 유기적 관계 속에서 표현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 작품들에서 자연은 민중의 삶의 배경이 아니라 민중 자체와 동일화된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서 소위 민중의 삶을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요소들은 거의 사라지고 나타나지 않는다. 그 자연이 곧 민중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민중을 이해하는 작가 손장섭의 시선은 자연을 바라보고 그리는 시선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나무와 풍경을 통해 그려지는 민중은 어떠한 것인가? 1980년대 역사화 연작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민중은 억압받고 고통받는 존재로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그 억압에 저항하는 전투적 모습으로도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손장섭이 그리고 있는 저 나무들과 산들처럼 민중은 침묵 속에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이 침묵은 어떤 무능력이나 수동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반대로, 그 어떤 저항보다도 강력한 저항, 그 어떤 능동적인 행위보다 더 능동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요란하지도 않고 아우성치지도 않지만 500년을 넘게 한 자리에서 자신을 지키며 존재하는 저 나무들, 그것은 역사와 삶의 주체인 민중의 모습 자체인 것이다. 손장섭은 저 나무들과 자연 풍경 속에서 민중이 자연과 함께 가지고 있는 이 생명력과 힘을 포착해낸다. 이 근원적 힘은 고요하지만 역동적이다. 작가 손장섭은 여기에서 어떤 정신적인 숭고함을 보고 있는 것이다.
유혜종 l 전시기획자, 미술사가
「역사, 그 물질적 흔적으로서의 회화: 손장섭의 2000년대의 회화」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