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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S
Hakgojae Gallery
강승희展
낮은 노동의 시간이다. 밤은 휴식의 시간이다. 그러면 새벽은? 새벽은 사유의 시간이다. 새벽은 우리의 몸이 깨어나기 전 혼을 먼저 불러 세운다. 세상이 요란을 떨기 전 세상의 본질을 먼저 드러내 보인다. 새벽에 혼과 본질은 그렇게 만난다. 그러므로 새벽을 사랑하는 이는 진리를 사랑하는 이이다. 진실한 삶의 길을 찾는 이이다. 바로 그런 이를 새벽 또한 진정으로 사랑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혼이 채 덜 깬 몸들이 새벽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본질보다는 욕망의 껍질이 새벽을 뒤덮기 시작했다. 새벽의 빛과 공기는 여전히 사유의 이슬을 낳고 있으나 인간의 의식은 그 이슬에 온전히 적기를 거부한다. 그렇게 새벽은 긴장의 시간이 됐다. 혼을 위한 시간으로서, 본질을 위한 시간으로서, 새벽의 순전한 가치가 잊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도시화, 산업화, 그리고 현대화가 낳은 소산이었다. 도시 역시 매일 새벽을 맞고 있지만 24시간 욕망으로 꿈틀대는 도시는 어느덧 새벽을 더 이상 사유의 시간으로 지켜내고 있지 못하다. 최근까지 강승희가 그려온 새벽은 도시의 새벽이었다. 적막한 침묵의 새벽이 아니라, 벌써 반은 부주해지기 시작한 그런 회색 공간의 새벽이었다. 물론 그 같은 회색의 분주함 속에서도 강승희가 보고자 한 것은 도시의 욕망이 아니라, 인간의 활력이었다. 밤의 환락과 욕망의 쟁투가 도시의 혼을 마취시킨 새벽이 아니라, 궁벽한 삶의 그림자 속에서도 새날의 기운을 받아 일어서고자 하는, 서민들의 의지가 빛나는 새벽이었다. 높은 빌딩과 거리의 뒤안에는 여전히 몽롱한 욕망의 토사물이 쌓여 있지만, 새벽부터 부지런히 생존투쟁을 벌이는 도시인들의 입김에서는 새로운 대기가 만들어져 나온다. 그것을 사유의 기운이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만, 그것은 분명 혼이 깨어 이는 이들만이 뿜어낼 수 있는 신선한 존재의 향기가 아닐 수 없다. 이번 전시에서 강승희가 선보이는 새벽 연작은 도시로부터 벗어난, 보다 전형적인 새벽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그의 판화에서 복잡한 시가지의 모습, 그러니까 콘크리트 건물과 가로등, 자동차가 사라지고, 새삼스레 나타난 강과 숲과 산, 그리고 바람, 이제 그의 새벽에서는 더 이상 간밤의 환락과 다툼의 그림자를 볼 수 없다. 그 무대가 됐던 시가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가로 뒤안으로 언뜻언뜻 보였던 욕망의 낙엽들도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이 자연의 새벽에 본격적인 사유의 시간이 다시 도래했기 때문이다. 강승희가 도시의 새벽에 매력을 느낀 것은 물론 인간의 자취가 좋아서였다. 새벽조차 흔들어 깨우는 인간의 에너지가 좋아서였다. 그러나 그 휴머니즘조차 넘어서는 자연의 손길이 새삼 그리워질 만큼 그의 나이테도 늘어났다. 새벽을 흔들어 깨우는 인간의 에너지도 좋지만, 역시 인간을 흔들어 깨우는 새벽의 기운만큼 그립고 사랑스러운 힘도 없다. 닭의ㅣ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는 것이고, 시계를 깨부수어 쓰레기통에 처박아도 새벽은 오는 것이다. 새벽이 좋은 것은 새로운 시작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느끼고 감사할 수 있다는 시간의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강승희는 발걸음을 도심에서 새벽의 한강으로 옮겼다. 저 상류에서 저 하류까지 그는 새벽이 들려주는 온갖 속삭임을 들으며 한강을 따라 걸었다. 사유의 발품을 팔았다. 그렇게 한강을 따라 흐르면서 그는 새벽빛이 얼마나 우아한 것인지, 그리고 새벽내음이 얼마나 향기로운 것인지 다시 한 번 절감했다. 그리고 이를 미묘한 톤의 변화로 섬세하게 표현했다. 판을 부식시켜 농담을 조절하는 아쿼틴트 기법의 에칭 판화로서는 보기 드물게 톤의 변화가 풍부하고 다채롭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오랜 세월 그가 에칭에만 매달려 집요하게 연구, 개발해온 독자적인 표현 기법의 노하우 덕이 크다. 그 톤의 미묘함이 매우 잘 드러난 작품 가운데 하나가 <새벽 한강-2029>인데, 강 가운데 외로이 떠 있는 빈 배를 그린, 매우 서정적인 그림이다. 그 고독한 빈 배의 허허로움을 보고 있자니 역시 새벽의 사유란 사람이 자신을 비운 만큼 얻게 되는 충만함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새벽에 일어나고자 하는 이는 그처럼 자신을 비울 일이다. 자신을 비운 이라면 또 그렇게 새벽에 일어날 일이다. 새벽을 사랑할 일이다. 충만하게 비워지도록. 새벽의 빈 배만이 진정한 만선을 꿈꾸며 새로운 출발의 닻을 올린다.
  • DATE
    2001.12.06 - 2001.12.19
  • ARTIST
Artwo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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