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꿈을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다. Dream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꿈이나 꿈결같은 몽상을 의미하기도 하고 장래의 꿈처럼 목표하는 이상을 나타내기도 하고 또는 상상, 환상을 뜻하기도 한다. 고명근 선생은 이번 전시 ‘Dream of Buildings’에서 꿈에 또 다른 의미를 덧붙여 그의 구조물들은 꿈을 꿈으로써 인간으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주체가 된다. 이번 전시의 주제는 꿈에 관한 것인데, 재미있는 것은 고명근 선생의 작업과정이 스트레이트 사진들을 재구성하고 재해석한다는 점에서 꿈이나 무의식과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꿈의 요소들이 결합하여 전혀 다른 의미를 구성하는 것처럼 작품을 구성하는 건물사진들은 서로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생성한다. 꿈은 반복과 시간성의 부재로 모순이 없다는 특징이 있다. 현실에 논리적 정합성은 꿈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고명근 선생의 꿈을 꾸는 빌딩들은 아크릴 구조에 플라스틱으로 코팅된 투명한 필름으로 구성되어 투과성이 있다. 이 구조물들은 안과 밖이 서로 투사된다. 안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건물들, 현실의 어느 건물도 유리창을 빼고는 건물의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다. 이런 건물의 비현실성은 전혀 모순이 없이 그의 작품 속에서 봉합되어 있다. 투명한 건물에 물이 넘치도록 가득 찬 빌딩이며 문으로만 이루어진 빌딩, 또는 창문으로만 이루어진 빌딩, 이것들은 건물로서의 자기 목적을 잃어버리고 오로지 스스로의 꿈에 충실한 꿈꾸는 건물들인 것이다. 프로이트와 라깡과 같은 정신분석학자에 의하면 꿈은 무의식의 원천이다. 그리고 이 무의식은 주체를 형성한다. 데카르트의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그들에게는 ‘나는 꿈을 꾼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바꾸어야 한다. 근대주체는 사유에 존재근거를 두지만 현대 이르면 주체는 확실한 자아를 의심한다. 그 과정 속에서 주체는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라는 인간화 과정을 가집니다. 이 세 단계의 인간화 과정은 보로미아의 매듭처럼 서로 겹치지 않고 공존하면서 인간의 삶을 지배한다. 상징과 실재가 만나는 지점에 환상이 존재하듯 고명근 선생은 상징계와 실재계에 걸쳐진 곳에 구조물을 형성함으로써 상상계의 세계로 그 영역을 확장한다. 그의 작품은 세 개의 서로 다른 세계가 서로 겹치지 않고 공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인간화 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환상의 위치에서 꿈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고명근 선생의 작품을 형성하는 대부분의 사진 이미지들은 과거 어떤 시간의 축에는 훌륭하게 그 역할을 다 했겠지만 지금은 주거기능을 상실하여 인간이 떠나버린 텅 빈 건축물들이다. 더 이상 존재이유가 없는 건축물들인 것이다. 인간과의 관계에서 인간은 주체이고 건축물은 언제나 객체였다는 점에서 그의 뷰파인더에 포착된 건축물들은 주체를 위한 객체가 아니라 스스로 존재의 이유가 내포된 실체이며 주체이다. 이번 전시 에서 우리는 건축물들이 스스로의 목적과 기능을 가지는 기념비처럼 객체와 주체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거듭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더불어 빌딩들의 주체 선언을 들을 수 있다. “나는 꿈을 꾼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