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지 않는 사물을 그린 그림을 정물화라 한다. 정물화의 영어 이름은 ‘still life’. 게르만어계에 속하는 네덜란드와 독일에서는 각각 'stilleven' 'stilleben'으로 쓴다. ‘정지된, 움직이지 않는 생명’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라틴어계인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로는 각각 ‘nature morte' 'natura morta'라고 적는다. ’죽은 자연‘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서양인들에게 정물은 이처럼 정지돼 있거나 죽은 생명 혹은 자연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죽은 생명과 자연은 근본적으로 덧없음을 드러내는 것들이다. 서양인들이 아름답고 화려한 정물화 앞에도 결코 놓지 않았던 인식의 끈이다. 그러나 정지돼 있다고, 움직이지 않는다고 모든 것이 죽은 것일까? 사람들이 잠든 사이에 인형들이 한바탕 소동을 벌이거나 찻잔과 시계 따위가 말다툼을 한다는 동화, 그리고 오래된 빗자루나 부지깽이가 도깨비가 되어 사람을 놀라게 한다는 전설들은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이런 사물들이 나름의 생명을 가진 대상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들은 결코 정지돼 있거나 죽은 것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강미선의 그림에 등장하는 정물들도 정지돼 있거나 죽은 상태에 있지 않다. 그것들은 나름의 은근한 목소리로 우리들에게 말을 걸어오는 존재들이다. 서양의 화가들이 정물을 죽은 대상으로 다룬 반면 강미선은 그것들을 살아 있는 친구로 대한다. 강미선의 그런 태도는 의도에 따른 것이 아니라 화가 자신이 애당초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살아왔기에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화가는 사물들의 언어를 알고 있고 그것들과 대화하는 법을 알고 있다. 살다 보니 어느 날 그렇게 대화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그의 그림을 보며 우리가 얻는 즐거움은 바로 그 대화를 엿듣는 것이다. 물론 대화의 내용은 그리 심각하거나 복잡한 것이 아니다. 그저 안부를 묻고 날씨를 묻고 그 밖에 소소하고 자잘한 생활의 단편들을 주고받는 것이다. 누가 엿들어도 그만인, 그렇고 그런 평범하고 소박한 이야기들. 그러나 실은 이런 이야기가 진짜 이야기다. 귀한 정보를 주고받았다고 그것이 가장 값진 대화라고 누가 말할 수 있으랴? 평소에 t로 소소한 대화만 자주 나눴어도 헤어지지 않았을 부부가 그 얼마이겠는가? 하루에 따뜻한 말 한마디씩만 주고받았어도 여전히 친구 같은 관계를 유지할 아버지와 아들이 그 얼마이겠는가? 영양가 엇고, 건더기 없는 대화 같아도 대화는 내용보다 나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그렇게 이심전심으로 말 아래로 이어지는 정서적 교류가 더 중요하다. 강미선의 그림에서는 주변 사물들과 훈훈한 정서적 교류를 나누는 화가의 모습이 보인다. 우리에게 대화가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모두가 다 외롭고 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외로움과 약함이 실은 가장 좋은 대화의 조건이다. 내가 외로움과 약함을 드러낼 때 상대도 나에게 외로움과 약함을 드러낸다. 그리고 둘은 더없이 끈끈한 친구 사이가 된다. 강미선이 사물들에게 말을 거는 습관도 그와 비슷한 것 같다. 그는 자신이 그 어떤 대단한 것도, 그 어떤 자랑할 만한 것도 없으며, 그저 가지고 있는 모든 외로움과 허전함을 사물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고 속삭인다. 사물들도 이를 반기며 자신들의 흘러가 버린 시간과 외로운 오늘에 대해 이야기한다. 빈 그릇은 그 비어 있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뭇잎이 다 떨어진 나무는 그 앙상함에 대해 그리고 연주자 없이 홀로 펼쳐진 악보는 그 적막함에 대해 각각 이야기한다. 이렇듯 자신으로부터 떨어져나간 것들을 이야기하는 와중에 이들은 그 빈 부분을 채워주는 서로를 발견하고, 이런 격의 없는 대화로 인해 평범한 생활이, 일상이 얼마나 따뜻하고 행복해지는지 체험한다. 그 은은한 만족감과 충일감이 한편으로는 비어 있는 듯 한 강미선의 그림을 가득 메운다. 관자의 마음에도 그만큼 따뜻한 대화가 밀려든다. 서양의 화가들은 정물을 그리며 부단히 정자와 죽음을 대면했다. 사물들 앞에서 그들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물론 신이 선물한 구원에 대한 기대로 나름의 보상을 얻었겠지만, 그래도 어떤 형태로든 자연과 분리되는 경험은 아픈 것이다. 강미선은 그 사물들을 보듬어 안는다. 사물들 앞에서 인간이 외로웠던 만큼 인간 앞에서 사물들도 외로웠을 것이다. 강미선은 같은 처지에서 사물들과 이야기한다. 서로의 모자람과 외로움을 주고받는다. 그럴 때 자연이 그를 품어 안는 경험을 한다. 소자에게 베푼 우리의 사랑에 신이 감동하듯, 외로운 사물에 건넨 우리의 정에 자연이 흐뭇해한다. 우리가 주는 만큼, 아니 그 이상을 자연은 늘 우리에게 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