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악기의 음색이었다. 당근 껍질색인 캐롯 오렌지와 연어 살빛인 샐먼 핑크, 풋사과 표면색인 애플 그린과 원색에 가까운 빨간색인 시그널 레드 등. 심현희 예술은 왼손으로 줄을 눌러 완전 4도 높은 음까지 자유롭게 넘나드는 가야금의 농현(弄絃)을 현란한 색으로 구사하고 있었다. 그런가하면 〈장미〉, 〈호접란〉,〈다알리아〉,〈나〉등 스타카토처럼 저마다 확실한 명패를 가진 그림의 제목들은 네 개의 현으로 거침없이 다양한 음을 짚어 내는 바이올린 독주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레몬색 장미가 올리브빛 하늘을 빠르게 가르고, 겨자색 호접난이 조개 속살 빛 대기를 경쾌하게 스치는 삼 년 전 심현희의 개인전은 신명나는 현의 노래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이다. 자연으로 종착되는 꽃과 사람이 소재인 점이 그러하고, 시원시원한 붓질과 거침없는 나이프로 색과 형을 솔질하게 내지르는 표현법도 그러하고, 작품마다 똑 부러지는 이름표를 가슴에 당당하게 달고 있는 품새도 그러하다. 심현희 작업의 주요한 특성 중 하나는 ‘일관성’이다. 여러 평자들은 두 번째 전시는 첫 번째 전시와 맥이 닿아있고, 세 번째 전시는 두 번째 전시와 손을 잡고 있으며, 네 번째 전시는 세 번째 전시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식의 표현으로 심현희 작업의 ‘일관성’에 주목해 온 바 있다. 일관성의 사전적 정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은 성질’이다. 이러한 정의를 염두에 둔다면 그는 바뀌고 변화하는 것에서는 서너 걸음 떨어진 작가가 된다. 하지만 장지에 채색을 올린 심현희 초기 인물화들과 캔버스에 아크릴을 사용한 최근 꽃그림들 사이의 행간은 넓기만 하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일기를 쓰는 과정이다.’ 작업에 대한 정의는 작가의 그림만큼 명쾌하다. 일기란 무엇인가. 내밀한 개인의 기록이고 진솔한 내면의 고백이 아니던가. 오늘을 성찰적으로 맺고 내일을 조심스레 준비하는 것이 아니던가. 이처럼 심현희는 삶의 언저리에서 그림을 시작하고, 그림의 끝자락에서 삶을 정리한다. 그랬다. 그에게 ‘일관성’은 똑같음이 아닌 ‘꾸준함’이며, 꾸준함은 진부함이 아닌 ‘또 다름’을 예비하는 부단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또 다름’을 향해 자신의 예술을 조바꿈할 타당한 근거를 얻게 된다. 일관성의 변주를 통해 새로움을 추구하는 심현희. 이번 전시에서 그가 선보이는 첫 번째 변주곡의 곡명은 〈우울한 날〉이다. 노랗고 빨간 꽃이다. 형과 색 모두가 절정에 달한 꽃이다. 아무래도 우울한 것은 이 꽃들이 아니라 그 사이에 있는 여인인가 보다. 여인의 얼굴은 물감 범벅이다. 푸르기도 하고 붉기도 얼굴색은 현대음악의 불협화음처럼 조화보다는 긴장 쪽이다. 폭발하는 색 사이사이로 겨우겨우 보이는 눈, 코, 입은 두터운 마분지를 잘라 붙인 것이다. 잘라 붙인 것은 이목구비만이 아니다. 단발머리의 꽃장식 또한 그렇다. 대략적인 꽃의 형태인지라 정확한 명칭은 힘들다. 그 위로 단추가 넷이다. 두터운 캔버스 천에 바느질한 것이다. 화해할 수 없는 색들이 모여 얼굴을 이루듯, 크기와 모양과 재질이 다른 것들이 모여 꽃이 된다. 다양한 소재의 첨가는 캔버스에 아크릴이 주를 이루던 심현희 작업의 형식적인 변화이다. 과거에는 색을 쓸 때 이 색 옆에는 꼭 저 색이어야만 했다. 이것은 꽃을 꽂을 때 이 꽃 곁에는 꼭 저 꽃이어야만 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최근에 그는 이 색이 꼭 저 색과 짝이 아니어도 흡족하고, 이 꽃이 꼭 저 꽃과 쌍이 아니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아크릴에 대리석 가루를 섞어 보기도 하고, 이런저런 천을 붙여보기도 하고, 바늘을 수차례 부러뜨리며 꿰매기도 해본다. 이런 심경의 변화와 맞닿아 있기에 새로운 형식 실험은 하나가 둘이 되는 단순한 변화 그 이상을 의미한다. 이질적인 재료들을 붙였다 떼었다 반복하는 과정은 그에게 작업에 더 적합한 재료를 찾는 시간이기도 했겠지만 더 너른 세상을 보듬어 안는 과정이기도 했을 것이다. 나의 이런 추측은 보다 수다스러워진 작품 제목에 근거한다.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그림 네 폭이 하나를 이룬다. 작품 제목은 〈꺾고 싶기도 하고〉, 〈화병에 꽂고 싶기도 하고〉, 〈머리에 꽂고 싶기도 하고〉, 〈물에 띄우고 싶기도 하며〉이다. 그동안 그는〈무제〉처럼 대충 얼버무리는 법 없이 분명한 제목을 그림에 붙여왔다. 장미를 그린 그림은 〈장미〉였고, 남자와 여자를 그린 그림은 〈남과 여〉였으며, 작가 자신을 그린 그림은 〈나〉였다. 논리정연한 방정식과 같은 제목 앞에서 질문은 금지다. 물론 이번에도 〈꺾고 싶기도 하고〉에는 손의 형태가, 〈화병에 꽂고 싶기도 하고〉에는 화병의 모습이, 〈머리에 꽂고 싶기도 하고〉에는 여인의 머리가, 〈물에 띄우고 싶기도 하고〉에는 나비의 형상이 있다. 작업의 모호함을 덜어내는 설명적인 소재들이다. 그럼에도 가능할 것 같다. ‘이 꽃을 꺾어서 어디에 쓰실 생각이세요?’ ‘저 큰 꽃이 들어갈 만한 화병이 있을까요?’ ‘이 꽃 모두를 머리에 꽂고 싶으세요?’ ‘왜 이 꽃을 물에 띄우고 싶으세요?’ 이렇게 물어도 괜찮을 것 같고, 작가 특유의 정직한 답변이 건네질 것 같기도 하다. 서사적인 제목에서 촉발된 더 많은 소통의 가능성이 솔직함을 미덕으로 하는 작품 주변을 더 수선스럽게 만든다. 더 많은 이야기, 더 많은 공감대가 만들어낸 수선스러움이다. 이런 수선스러움은 〈아내라는 말에는 소금기가 있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내라는 말에는 소금기가 있다. 보들레르의 시처럼 나트리움과 젓갈 냄새가 난다. 쥐오줌풀에 밤이슬이 맺히듯 이 세상 어디서나 꽃은 지고 꽃은 핀다. 그리고 간혹 쇠파이프 하나가 소리를 낸다. 길을 가면 내 등 뒤에서 난데없이 소리를 낸다. 간혹 그 소리 겨울밤 내 귀에 하염없다. 그리고 또 그 다음 마른 나무에 새 한 마리 앉았다 간다. 너무 서운하다. 이번에는 아내를 떠나보낸 뒤 김춘수가 쓴 시 〈비가〉의 한 구절이 고스란히 작품이 되었다. 신문 지면에서 우연히 접한 시구에서 작가는 그 소금기에 대해 추억했다. 엄마 품에 포옥 안기면 와락 달려들던 그 냄새. 그것은 무엇으로 형언할 수 없는 그저 막연한 ‘엄마 냄새’였다. 작가가 막막했던 것은 시인이 그 막연함을 정확히 ‘소금기 어린 젓갈 냄새’라 표현한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냄새는 이제 유년의 기억이 아닌 작가의 오늘, ‘소금기 어린’ 현재가 되었다. 그렇게 작가의 지금이 굵직하고 불그스름한 윤곽선 안에 담긴다. 시인이 말한 소금기 어린 아내이고, 작가 자신이며, 아내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초상이 바로〈아내라는 말에는 소금기가 있다〉이다. ‘나이가 드나 봐요.’ 이번 작업 과정의 힘겨움을 이렇게 토로하는 작가 심현희. 누눈가가 나이가 든다는 것, 예술가가 나이가 든다는 것, 그것은 분명 속절없는 허망함만은 아닐 터이다. 심현희의 경우처럼 만약 나이 드는 것이 향기로운 꽃들 사이에서 젓갈 냄새나는 존재를 기꺼이 인정하는 과정이라면, 만약 나이 드는 것이 작업의 소재를 보여지는 사물에서 함께 사유하는 대상으로 감싸 안는 수순이라면, 만약 나이 드는 것이 지금껏 솜씨와 기량을 마음껏 연주하는데 익숙했던 악기를 바꾸는 것에 대해 숙고하는 시간들이라면. 나 또한 칼 윌슨 베이커의 시 〈아름답게 늙게 하소서〉에서처럼 ‘레이스와 상아와 황금 그리고 비단도 꼭 새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다’라는 구절에 수긍하고, ‘오래된 나무에 치유력이 있고, 오래된 거리에 영화가 깃들듯이’라는 부분에 기꺼우리라. 다시 현의 노래이다. 몸집보다 큰 악기를 얼싸 안고 활을 그어야 비로소 연주자를 대신해서이야기를 전하는 첼로의 따뜻함과 연인을 부둥켜안듯 울림통을 보듬어야 제대로 소리가 뿜어져 나오는 하프의 넉넉함이 깊게 공명하는 현의 울림이다.
(공주형/학고재 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