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에게 있어서 겸손이란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가? 탐구하는 자에게서 보이는 이 겸손의 정신은 아직도 개척해야 할 경지가 많이 남았다는, 자기 예술의 확장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법관에게 있어서 이 겸손한 태도는 그의 예술을 늘 새롭고 신선하며, 갱신해야 할 그 무엇으로 만든다. 따라서 법관에게 있어서 그림이란 한눈에 보기에는 비슷한 것 같아도 자세히 살펴보면 서로 다른, 즉 같음과 다름의 차이에서 벌어지는 변주와도 같은 것이다. 반복적 행위에 의해 이루어지는 씨줄과 날줄에 의한 교직(交織)은 마치 이 세계가 다양한 종(種)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거기에는 같으나 서로 다른 차이들을 지닌 수많은 개체들의 상징처럼 보인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끊임없이 이어지는 저 숱한 반복적 행위들을 설명할 방도가 없다. 그것은 무엇에 대한 상징인가? 수화 김환기는 뉴욕 시절에 청색 점화를 제작하면서 서울에 두고 온 친구들을 생각하며 점을 찍는다고 말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우주를 사념의 바탕으로 삼고 있는 법관은 밤하늘의 별들을 생각하며 수평과 수직의 교점을 반복하는 지도 모를 일이다. 선(禪)의 세계를 추구하는 법관은 수행의 방편으로 그림을 택했고 그림은 이제 그의 삶 자체가 되었다.
“인과론적 독재의 논리에서 벗어나 상대론적 관계성에 입각해 정신의 여유를 찾고자 하는 것이 법관이 지향하는 태도가 아닐까 한다. 그의 그림에는 무수한 빗금들이 존재한다. 가로와 세로로 겹쳐진(+) 무수한 선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화면 위에 공존한다. 그렇게 해서 기왕에 그려진 선들은 바닥으로 가라앉고 그 위에 다시 새로운 선들이 자리 잡는다. 시간이 갈수록 그것들은 다시 화면 바닥으로 가라앉고 다시 새로운 선들이 나타난다. 이 선들의 공존은 융화(融和)의 세계를 이루며, 세계는 다시 반복되기를 그치지 않는다. 법관의 그림은 따라서 완성이 아니라 오로지 완성을 지향할 뿐이다.”
– 「날줄과 씨줄의 교직에서 파상의 반복적 곡선으로」 中 발췌 | 윤진섭 ·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