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산은 아름답다. 나는 겨울 산행을 특히 좋아한다. 흙빛에 거뭇거뭇 돌이 박혀있고 풀이 흩뿌려진 땅을 보고 걷는 일이 즐겁다. 펄펄 쏟아져 무릎까지 차오른 함박눈 속을 첨벙첨벙 걸으면 발걸음은 나로 하여금 무수한 생각을 허공에 펼치고 지우고 다시 떠올리기를 반복하게 한다. 이윽고 곧 명상의 상태처럼 자연 그 자체에 빠져들게 된다.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던 그 경험은 무의식의 수면 아래 켜켜이 쌓여 있다가 작업에 골몰할 때 저절로 떠오르곤 한다. 자연에 머물렀던 시간은 무수한 일상의 경험과 어우러져서 작업에 접근할 수 있는 근원이 된다. 자연의 변화를 살피는 것은 마침내 삶을 바라보는 시선과 공간에 대한 명확한 분석, 작가로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먹을 적신 붓과 연필, 목탄의 드로잉은 선과 면 자체로 작품이 되기도 하고, 집을 지어내기도 하며, 공간 안에 가구와 생활 소품을 놓는 선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그동안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탐색하기 위해 한국의 미감을 발현한 현대적 공간을 만드는 작업을 펼쳐왔다. 이번에는 공간 안에 ‘놓이는 것’을 통해 그를 찾아보고자 하였다. 이는 또 다른 작업이 되었다. 모든 것이 같은 선상에 놓여있으면서도 서로 달랐다. 사고의 흐름을 역행해 보기도 하고 모든 것을 뒤섞어 보기도 하며 첫 시작의 실마리를 찾았다. 자연에서 받은 영감을 풀어내고 그것을 예술의 가치에 투영하고자 하는 노력이 이어졌다.
공간은 존재하는 것들이 뿜어내는 기의 흐름이 담겨있는 곳이다. 디자인을 하고 건축을 하고 아트 디렉팅을 하는 일의 근원은 결국 자연과 예술을 향한 경배와 그것을 탐구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지난 시간 한국 무형문화재 장인과의 협업을 통해 ‘시간과 기다림에 대한 철학’, ‘보이지 않는 가치를 지켜내는 그들의 강기(剛氣)’를 보았다. 전통문화에 대한 배움 뿐만 아니라 삶, 정신, 그리고 사람의 가치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무형문화재 장인들이 전통문화를 보존, 계승하고자 하는 것은 고귀한 선택이다. 기술적 우수성만을 평가하기 이전에 그들이 갖추고 있는 정신적인 지향점의 가치를 살펴보고 평가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 이번 작품이 나오기까지 세계적 이탈리아 브랜드 프로메모리아, 뽀로, 판티니와 함께했다. 일년여간 그곳의 장인과 협업하며 그들의 사명감, 열정, 헌신적인 노력을 보았다. 작업의 사무적, 기술적 진행을 넘어 그들이 지향하는 정신세계가 모든 과정과 결과물에 투영되게 하는 집중력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인’이라는 말은 개인, 국가 혹은 시대를 초월하여 칭송 받을 만한 단어인 듯하다. 이들과 첫 만남부터 작품이 나오기까지 함께한 모든 시간들이 지금은 아련한 향수로 느껴진다.
모서리를 만들어내는 선의 유려함, 수평재와 수직재의 만남이 만들어내는 결구법, 부분 부분을 이루는 다른 소재와의 어우러짐에서 공존의 미덕을 생각해 본다. 조명의 몸체를 보며 땅에 힘차게 뿌리 내린 나무를 떠올리고, 빛이 만들어내는 형체에서 이른 봄 활짝 핀 매화의 모습을 발견한다. ‘서로 사귀어 오감’이라는 통섭의 뜻이 전달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김 백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