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그건 또 아니라고 했다
남자는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홀로였다.
까만 비닐봉지에서 소주를 꺼냈다. 손에 쥐면 바스락거리는 얇은 플라스틱 컵에 ‘처음처럼’을 따랐다. 담배를 피워 무는가 싶더니 그걸 돌 위에 올렸다. 향 대신 담배였다. ‘디스’였다.
남자는 절을 하지는 않았다. 처음 따랐던 소주를 무덤 위에 뿌리고는, 그 컵에 다시 소주를 따라 혼자 마셨다. 다시 담뱃불을 붙였다. 이번엔 돌 위에 올리지 않았다. 깊게 빨아댄 만큼 깊게 내뱉었다. 해가 뉘엿뉘엿했다.
나는 작업 중이었다. 작업복을 입은 남자에게 이곳은 작업장이 아니었지만, 작업복을 입지 않은 내게 이곳은 작업장이었다. 나는 옛 망월동의 부서져가는, 지워져가는 얼굴들을 사진기에 담고 있었다. ‘산 자’를 관찰하느라 흐트러진 눈을 가다듬어 ‘망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해가 기울고 있었으므로 작업을 서둘러야 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엉덩이를 빼고 바닥에 엉거주춤 엎드린 채 철커덕거리는 내 모습은 망측했을지 모른다. 남자가 다가왔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말투가 곱지 않았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518재단의 협조를 빠뜨리지 않는 영악함도 발휘했다. 남자는 누그러졌다. 그리고 푸념했다.
“이거 좀 너무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세요? 신묘역을 저렇게 삐까번쩍 다듬어 놨으니, 여기는 이렇게 방치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지....”
남자는 새 묘역에 들렀다 오는 길이라 했다. 거기 가니 마음이 편치 않아 옛 묘역으로 발길을 돌렸다 했다. 여기 오니 한결 마음이 편한데, 그와 동시에 속이 상한다고 말했다. 이곳이야말로 더 소중한 ‘성지’라고, 518정신은 바로 이곳 옛 묘역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곳을 이렇게 폐허처럼 방치할 수 있느냐는 게 그가 품은 의문이었다. 이렇게 사진을 찍어가면, 뭘 개선할 수 있느냐고 그는 물었다. 능력 밖의 일이라고 답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이었다. 노력해보겠노라는 허튼 다짐을 하지도 않았다. 대신 나도 물었다. 당신은 이곳이 새 묘역처럼 깨끗하게 단장되기를 원하는 건가.
여기 이 망가진 사진들을 모두 교체하길 바라는 건가. 남자는, 그건 또 아니라고 했다. 그는 답을 몰랐다.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답을 몰랐다. 답을 알았더라면, 우리는 이 곳 이 시간에 조우하지 않았으리라. 망월동은 80년대를 관통하는 질문이었다. 90년대를 훑고 새천년이 밝았다지만 질문은 종료되지 않았다.
황호걸은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소아마비를 앓는 형에게 말동무가 되어 주던 착한 동생이었다. 빛고을에 계엄의 피바람이 일자 호걸은 친구들과 함께 도청에서 시신 닦는 일을 자처했다. 넘쳐나는 시신으로 광주에서는 관이 턱없이 부족했다. 관을 마련하기 위해 호걸과 친구들은 시민군과 함께 버스를 타고 화순으로 향했다. 그게 화근이었다. 화순 입구에서 매복해 있던 계엄군은 버스를 향해 총탄을 퍼부었고, 호걸은 그 자리에서 운명했다. 복부에서는 창자가 터져 나왔고, 대퇴부에도 수십 발의 총탄이 뚫고 지나갔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유족은 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투쟁에 나섰지만, 돌아오는 것은 폭행과 연행, 협박과 회유였다.
잔인했던 군사독재도 이젠 끝나고 5월의 영령들도 이제는 명예를 회복했다. 허나 우리 사회는 여전히 광주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한다. 군홧발로 짓이겨진 대추리의 절규는, 살인자 대통령을 기념하겠다는 일해공원의 몰염치는, 외로운 섬 강정마을의 피눈물은, 흘러간 옛일이 아니다. 우리는 나랏돈으로 죽은 자와 죽인 자를 동시에 기념하는 부조리의 시간에 서 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은, 죽은 자의 편에서도 죽인 자의 편에서도 흘러나온다. 망각의 성립은 언제나 공조에서 비롯된다.
이럴 때, 역사는 재빠르게 권력의 의지를 읽어낸다. 스스로를 재구성한다. 예술은 어중간한 중립을 창조한다. 보편을 떠든다. 과거대신 미래를 보라고 선언한다. 순수를 가장한다.
망각, ‘그날’에 대한 망각은 결국, 반복되는 폭력을 승인하겠다는 게으른 의지의 표명 외에 또 무엇일까.
-작가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