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업의 기조는 현대 인간 문명과 자연, 그 사이(between)에서 조형적 다리를 놓는 것이다. 그 사이는 동양에서 여백이라고 불려왔고, 서양에서는 보이드(void)라 일컬었다. 이렇듯 현대 문명과 자연은 이분법(dichotomy)적으로 나뉘어 있지만 동시에 상호 이해의 가능성도 있다. 마치 동양화의 여백이 미니멀아트와 상통하듯이 말이다.
서구 평론가들은 내 작업에 대해 개념미술, 미니멀아트 등으로 명명하지만 애초에 나는 그런 구분들을 의식하고 작업하지 않았다. 그저 작업을 하다 보니 현대미술의 한 카테고리에 들어간 셈이다. 내게 여백은 현대 문명과 자연 사이를 잇는 다리다. 그리고 그 다리는 빛과 자연으로 환원되며 제 역할을 한다. 가령 도시의 콘크리트 정글 속, 치솟아 있는 인간 문명의 오브제 사이에 자그마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으면, 그것은 마치 성자(saint)인 양 내게 다가온다. 이런 현대 문명 속 아이러니들이 내 작업의 테마가 되었다.
이번 전시의 주제는 ‘달(luna)’이다. 서구 세계에서는 달보다 해가 더 큰 영향력을 지녀왔던 터라 달이 갖는 동양의 시적 개념을 취해, 그것을 현대적 언어로 풀어보고 싶었다. 달은 해보다 더 음성적(negative space/void space) 시적 구조와 이미지를 엿볼 수 있는 소재다. 내게는 달빛이 연상시키는 단색적 사고(monochromatic thinking) 개념이, 해보다 더 진한 여백의 개념으로 이끈다.
설치 작업 <월인천강月印千江>에서 나는 하늘 그 자체가 아니라 지상과 하늘의 연계성을 표현하고 싶었다. 내 작업의 시제는 ‘지금’이다. 세계의 모든 도시는 자연을 파헤치고 가공한 것이다. 그것이 현재 지구의 모습이다. 이는 내가 일 하는 작업 현장과도 같다. 그곳에 파헤쳐진 흙들은, 어떤 의미에서 자연이 내게 준 여백이기도 하다. 흙은 현대인의 자연 복귀에 대한 열망을 뜻한다. 이 도시 공간에 모습을 드러낸 자연, 즉 달과 흙은 내 작품의 진행 과정이거니와 정신적 흔적, 그 떨림(tremor)이다.
과거는 현재에 흔적을 남긴다. 정신에도 마찬가지다. 예술은 출발과 끝이 가장 중요하고, 불교 또한 내 출발점이자 도착점이다. 내가 서 있는 이 도시 문명과 내가 열망하는 자연의 틈이 내 마음의 여백이다. 또한 불교는 내게 공, 그러니까 여백의 종교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예술은 자신의 신앙을 만들어가는 길이 아닐까.
-작가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