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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붓길따라 오백리 

문봉선 

 

섬진강, 붓길따라 오백리 잔정이 많은 땅. 정이 넘쳐,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 발병날 거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땅. 님을 옆에 두고도 볼수록 그 님이 더 그립다며 타령을 하는 사람들이 사는 땅. 징헌 땅. 그렇게 슬퍼하고 그렇게 웃고 그렇게 어우러지는. 그래서 인정을 풀풀이 풀어 강물처럼 흘려보내야 직성이 풀리는 땅. 그렇게 사람을 닮은 땅. 사람이 되고 싶은 땅. 이것이 요즘도 우리 화가들이 우리 땅을 잊지 못하고, 그리고 또 그리고 싶어 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문봉선이 섬진강을 따라가며 우리 땅을 보고 그리는 가장 큰 이유이다. 섬진강. 전북 진안군 백운면의 팔공산에서 발원하여 남해의 광양만으로 흘러드는 길이 212.3km의 우리네 심성. 그 강의 흐름을 따라 문봉선은 내리 발품을 팔며 걸었다. 걷다가 그 강이 수더분하고도 인정어린 표정으로 다가오면 화첩을 풀어 그 너그러움을 잡아보고, 또 걷다가 그 강이 설레는 소녀의 눈길처럼 달아나려 하면 다시 그 수줍음을 화첩에 살짝 끼워넣었다. 그는 그렇게 발로 그렸고 몸으로 그렸고 마음으로 그렸다. 섬진강. 그 강을 따라 흐르는 동안 문봉선은 구름에 달 가듯이 우리네 마음을 자신의 붓끝으로 흘려보냈다. 그 강물처럼 그렇게 허허롭게, 그 강물처럼 그렇게 아기자기하게, 그 강물처럼 그렇게 구불구불하게, 그렇게 그는 우리네 소회를 붓길로 구비 쳐보았다. 어디 강을 따라 내리 걷는 게 쉬운 일인가. 어디 붓 한 자루로 강 하나를 다 따라 흐른다는 게 쉬운 일인가. 하지만 그는 걸었고 또 그 강 하나를 다 그렸다. 그 강이. 그 땅이 그를 어머니처럼 받아주었기에. 그 산하가 그를 사랑하는 피붙이로 품어주었기에 그렇게 그릴 수 있었다. 거기에 정복적인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작가의 자기 정복이 있을 뿐이요, 거기에 욕심이 있다면 우리의 자연으로부터 사람 사는 법을 배우고자 하는 작가의 구도자로서의 욕심이 있을 뿐이다. 물론 때로 세상의 명리도 스쳐 지나갔을 것이요, 또 세상의 타산도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걸음에 숨이 차고 산들바람이 더할 수 없이 고맙게 느껴질 때쯤이면 모든 세속의 잡념은 다 사라지고 그지없이 고맙기만 한 우리 땅의 인정에, 그저 풀 한포기로 이곳에 솟아나도 복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을 것이다. 그는 그 복을 그렸다. ‘지복(至福)을 그렸다. 문봉선이 지금껏 관심을 가진 우리 땅의 풍경은 설악산, 북한산 등 잘 생긴 산들이 대부분이었다. 골기로 표출된 양기는 문봉선 특유의 힘찬 붓질에 썩 잘 어울렸다. 그의 젊음이 드러낼 수 있는 모든 정력을 그는 그렇게 그 산들에 쏟았다. 그런데 그 산들 사이로 그는 이제 골을 찾고, 강줄기를 찾고, 나아가 들판을 찾는, 낮은 데로 성큼성큼 나아가는 자신의 발걸음을 본다. 그의 연륜의 해가 이제는 중천에서 약간 비끼려 하는 탓일까? 그렇게 흙과 물을 밟으면서 그는 우리 땅의 육덕을 새롭게 느끼고 우리 땅의 너그러움에 새삼 탄복을 하고 있다. 큰 산들이 물러선 자리에 하늘이 드넓게 펼쳐지고, 나지막한 야산과 수평으로 흐르는 땅은 하늘만 높은 게 아니라 세상 또한 넓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하늘이 땅과 늘 평행으로 달리는 것은 우리가 하늘과 땅 사이에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사랑가야 할 존재임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닐까. 땅에 운명을 둔 존재가 하늘을 꿈꾸는 까닭에 온갖 갈등과 아픔이 존재하지만 결국 묵묵히 모든 것을 받아주는 땅이 있어 사람은 외롭지 않다. 그러므로 세상을 가로지르는 지평선은 수직적 존재로서 인간의 실존을 보다 강력히 부각시켜 주는 것이지만, 바로 그 수직적 존재를 받쳐주는 바탕이기도 한 까닭에 우리는 땅을 대할 때마다 짙은 모성을 느끼게 된다. 자식을 세상에 내보내놓고도 여전히 무한한 사랑으로 그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를 느끼게 된다. 문봉선은 섬진강에서 그 모성을 가장 따뜻한 체온으로 체험했다. 조형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의 이번 그림은 무엇보다 시원한 하늘이 인상적이다. 순백의 너른 공간. 훵하니 뚫린 것이 우리의 속 좁은 마음을 자꾸 들춰보려는 것만 같다. 담묵으로 발린 구름의 인상이 그 공백에 표정을 더한다. 속절없이 세상을 등지는 듯한 것이 구름의 일반적인 이미지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이 땅의 울림을 하늘에 전하는 메신저일지도 모른다. 문봉선의 구름은 땅의 생각을. 인간의 마음을 하나의 파문처럼 하늘 위에 그리고 있다. 그것이 옅으므로 아득하지만 우리의 반영인 까닭에 결코 낯설지 않다. 때로는 몇 점만 남아. 때로는 양떼처럼. 구른은 담백함과 풍요함 사이를 오간다. 나지막한 야산과 땅들은 대체로 보다 짙은 먹색에 잠겨 있다. 그것은 이들 야산가 땅이 결코 기운을 잃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385년 왜구가 섬진강 하구에 쳐들어왔을 때 수십 만 마리의 두꺼비 떼가 울부짖어 왜구가 광양만 쪽으로 피해갔다 해서 두꺼비 섬(蟾)자, 섬진강이라 했다던가. 그 기운은 문봉선의 그림에서도 여지없이 느껴진다. 게다가 문봉선은 잡풀과 나무 등을 표현하면서 드센 유화 모필을 동양화 붓처럼 깎아 깔깔한 갈필로 그렸다. 원만하고 푸근하지만 심지 굳은 남도의 땅과 잡풀을 그는 그와 같이 정색을 하고 그림으로써 풀 한포기, 돌 하나가 다 소중한 존재임을 은연중 드러내 보인다. 이렇게 하늘을 펴고 땅을 펼친 다음 문봉선은 간간이 수직으로 우뚝 선 나무나 항상 바람과 힘겨루기 하기를 좋아하는 대숲을 그려 넣었다. 수평과 만나는 수직의 실존. 앞서도 수직이 인간의 실존을 시사한다고 언급했지만 반듯이 서 있는 나무는 기개 있는 선비나 굳센 농군을 연상시킨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처럼, 그렇게 나무는 서 있고, 그렇게 나무는 하늘과 땅을 잇는다. 어쩌면 우리는 자존심을 반듯이 서 있는 나무들에게서 배웠는지 모른다.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결코 제 모습을 잃지 않는 대나무들 또한 우리의 마음을 맑게 씻어주는 고마운 자연의 벗이다. 짙은 먹으로 빽빽이 들어차 있는 대나무 숲에서 우리는 청신함과 청량함을 질리도록 느끼며, 먹이 아니라 시원함 그 자체일 l수 있음을 문봉선의 묵죽림에서 선연히 확인하다. 이렇게 문봉선의 하늘과 땅, 물, 그리고 나무와 대숲을 따라가다 보면 또 고목도 나오고 오래 된 정자와 석물, 물안개, 봉분 따위도 나온다. 굽이굽이 흐르는 강의일생이 주위의 자연과 어울리며 길고도 넉넉한 파노라마를 만드는 것이다. 문봉선은 그 호흡을 놓치지 않고 그 리듬 그대로 형상화하려 애썼다. 특히 이 모든 단편들을 하나로 이어 22m짜리 긴 횡폭으로 그린 초대형 대작<섬진강(江山無盡)>은 그의 섬진강이 그의 마음속에 얼마나 깊은 사연으로 남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문봉선은 섬진강을 그렸지만 섬진강은 문봉선의 마음을 그렸다. 이렇듯 섬진강은 광양만에서 그치는 강이 아니라 이 나라 사람들 모두의 마음속에 대대로 이어 흐르는 마음의 강이요, 정의 강이다.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자. 우리네 소박한 살림살이와 우리네 따뜻한 인정이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