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가 석철주는 한국화의 현대화를 모색해 온 작가다. 그는 16세에 청전 이상범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서 전통 한국화 기법을 익혔고, 그 뒤 대학에서 한국화를 본격적으로 공부하였다. 한국화 ‘전통의 수용과 현대적 변용’은 석철주 작업의 화두다. 그는 이 과제를 다양한 형식 실험으로 해결하고자 꾸준히 노력해 왔다. 그가 사용한 재료와 기법은 전통 한국화의 것과는 사뭇 달라서 낯설기도 하다. 하지만 이를 매만지는 작가의 태도는 매우 한국적이다. 스며들게 함으로써 배어나게 하고, 숨김으로써 드러내 보이는 우회적이고 간접적인 방법이 그것이다. 이번 전시 또한 설명과 묘사 대신 ‘비움과 남김’으로 독특한 미학세계를 구축해온 작업을 연장하고 있다. 작가의 작업 순서는 다음과 같다. 우선 한지를 배접한 캔버스를 준비한다. 그 위에 바탕칠을 하고, 검거나 하얀 색을 한 겹 더 입힌다. 이 과정이 마르기 전에 맹물을 적신 붓으로 형상을 그린다. 다시 그 위에 마른 붓으로 여러 번 붓질을 한다. 이런 순서를 거쳐 아련한 흑백의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마치 시간을 두고 삭혀야 맛이 나는 한국 전통 음식의 원리와 같다. 석철주 그림의 깊고 은은한 맛 역시 먹과 종이의 스밈과 번짐 그리고 삭힘의 과정을 통해 얻어진 것이다. 석철주는 생활을 바탕으로 한 그림을 그린다. 작품 제목이〈생활 일기〉인 까닭도 여기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선인의 체취가 느껴지는 기물들에서 주변의 풍광으로 소재가 확장된다. 꽃, 화분, 분재, 담벼락, 빗물 등이 그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삶의 한 부분을 이루어 왔다. 작지만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다. 석철주는 이 작은 것들에서 우리네 ‘삶의 원형’이라는 큰 것을 보게 하는 작가이다. “초봄에 꽃이 필 때 등불을 켜놓고 책상 위에 난분을 올려놓으면 이파리의 그림자가 벽에 비치어 아른거리는 것이 즐길 만하고 글을 읽을 때 졸음을 쫓을 만하다.” -강희안 ‘양화소록’ 中- 시정이 느껴지는 이 글귀는 석철주가 좋아하는 문구이다. 창호를 스치는 달빛이 빚어낸 세상과 같은 석철주 그림에 고즈넉한 이 글귀가 스며들어 있는 것 같다. 오늘날은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속도의 시대이다. 가속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느림’의 미덕을 이야기한다. 몸은 속도에 맞추어져 있지만, 마음은 부족했으나 따뜻할 수 있었던 과거를 향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잠시 잠깐 걸음을 멈추고, 쉬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깊고 넒은 그늘을 만들어 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