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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민: 이같이 별일 없는 날이지만, 

임지민 

 

그러고도 이 편지의 맨 끝에 꾹꾹 눌러 쓰나니 부디 당신은 사라지지 말아라

 

이병률 시인의 시 당신은 사라지지 말아라의 마지막 문장이다시집을 읽다가 이 문장이 있는 곳에 꽃잎을 꽂아두며 이 마지막 말을 마음에 새겼었다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우연히 다시 이 시집을 읽다가 꽂아두었던 꽃잎을 발견하였다꽃잎은 바짝 마르고 납작해진 상태로 여전히 꽂혀있었고나는 그것이 사라지지 않았음에 안도하였다.

 

요즘 내가 일상의 풍경상황들을 바라볼 때 가장 크게 발현되는 감정은 불안이다그 동안 쌓여진 크고 작은 상실의 경험들은 현재를 바라보는 나의 태도에 조금씩 영향을 주었고최근에 불안이라는 감정이 더욱 더 크고 묵직하게 마음 속에 자리잡아가고 있다별일 없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고 그 안에서 마주하는 모든 것들에 더욱 큰 온기를 주려고 하는 만큼그것들이 사라지는 것이 두렵고 불안하다이번 전시는 이렇게 충돌되는 감정을 담은 작업들로 구성된다.

 

정방형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들의 제목은 안녕한 날들이다우리는 누군가의 안부를 물을 때에도반가운 인사를 건넬 때에도헤어짐의 아쉬움을 표현할 때에도 안녕이란 말을 쓴다만남과 반가움작별과 아쉬움 그리고 슬픔이 모두 담겨있는 말이다내가 바라본 안녕한 날들을 그리면서 이미 과거가 된 것들에 대한 그리움뿐만 아니라앞으로 헤어질 것들에 대한 그리움들을 미리 쌓아보고 있다언젠가 마지막 안녕 인사를 건네야 하는 것을 인정하고 그때를 위해 스스로 만든 대비책이면서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사라지지 않기를 원하는 양가적인 마음의 표현이다

 

목탄드로잉 애니메이션 작업 제목은 이번 전시제목과 같은 이같이 별일 없는 날이지만,이다바람에 떨어지는 잎이 아쉬워 손에 받아 책 사이에 꽂아두기도 하고흩어지는 빛들을 잡기 위해 피아노를 치며 빛을 유인해보기도 하고날아가는 새들을 붙잡고 싶어서 두 손으로 새를 만들기도 한다애니메이션 속에 등장하는 이러한 장면들은 하루하루 지나가는 날들 속에서 또 다시 상실의 경험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고군분투하고 있는 모습들이다하지만 결국에는 붙잡으려 했던 모든 것들은 한 마리 새가 되어 날아가 떠나며 이야기는 마무리 된다어쩔 수 없이 마주해야 하는 마지막 안녕 인사가 있다면현재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하였다이와 같이 별일 없는 날들의 현재를 더욱 충실하게 살아간다면그래도 마지막 안녕 인사를 조금은 담담하게 건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드로잉을 하고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 작가노트

 

 

 

Q. 작품의 소재는 어디로부터 오나.


소재는 대부분 나의 일상 속에 있는 것들과 최근의 기억들이다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한 단어나 문장으로 규정하기 어렵다고 여기는데이러한 내용을 한 화면에 담기 위해 가져온 수단 중 하나가 이다어릴 적부터 키가 작은 어린이의 시점에서 어른들의 손에서 드러나는 감정을 바라보고는 했다담담한 척하는 겉모습에서 드러나지 않는 불안과 긴장들이 손에서는 감춰지지 않을 때가 있었다이런 경험을 통해 은 내가 담고자 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와 감정을 함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상징이 되었다내 작업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손을 통해서 숨어있는 이야기를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Q. 드로잉을 재료 삼아 제작한 영상 작품이 새롭다.


소재를 바라보는 감정이나소재로 표현하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에 따라 작품의 채도가 달라지기도 한다특별히 정해진 틀은 없지만굳이 구분을 해보자면 나와 거리가 먼 것또는 먼 기억을 무채색으로 표현하는 때도 있다목탄 드로잉 애니메이션 〈이같이 별일 없는 날이지만,〉은 무채색으로 그려질 소재들을 모아서 이야기를 만들고 움직임을 만들어낸 것이다회화가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시와 같다면 영상은 수필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회화 작업을 하며 미처 표현하지 못한 것들을 풀고 싶은 욕구가 있었고영상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욕구들을 풀어보는 것 같다작품 속에 등장하는 새는 잡고 싶지만 잡을 수 없는결국은 떠나버리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과거에도현재에도붙잡으려 했던 모든 것들은 결국 떠난다별일 없는 날들 속 마주해야 하는 마지막 안녕 인사를 대하는 마음을 담아보았다.

 

Q. 유채 물감과 목탄을 함께 사용하는 점이 흥미롭다.


유채와 목탄을 한 화면에 사용하면 어떠한 이질감이 만들어진다그 효과를 통해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지 생각해 보았다종이와 다르게 캔버스에는 쉽게 목탄이 올라가지 않았기에정착액과 안료가 들어간 콩테를 목탄과 함께 혼합해보며 방법을 찾아 나갔다그러다가 화면 안에 유채로 프레임을 구축하고그 내부를 목탄으로 작업해보게 되었다이런 과정은 마치 내가 상실의 경험들을 가져와 현재의 앨범에 꽂아두는 것 같았고그것들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아쉬움과 불안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 되었다. 44점의 회화로 이루어진 〈안녕한 날들〉의 경우화면 속에 프레임과 여백이 있는 작업들이 함께 배치되며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할 것이라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