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의 대지-박향숙을 위하여 모토에 쿠니오 20년남짓 근무한 도쿄 국립 근대미술관을 물러나고, 다마 미술대학 (多摩美術大学) 으로 직장을 옮겨,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교원 생활을 시작한 것은 1998년 봄의 일이다. 미술관에서 대학으로 직장이 바뀐다고 하면, 누구나가 그것은 좋은 일이고, 지금부터는 시간의 여유도갖을 수 있으니 그야말로 연구에 몰두할 수 있을거라고 한가한 말들을 한다. 물론 그런 점도 있을 수 있으나, 나의 경우에는 예전 보다 더 바빠졌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소감이다. 그렇다고, 이 전직을 후회하고 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대학에는 미술관에서는 절대 찾아 볼 수 없는 것, 즉 살아 숨쉬는 학생들이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학생들과의 다양한 만남 만큼 교원 생활에 광채 혹은 음영을 주는 것은 없다. 특히 특정의 학생을 상대하다 보면 저절로 나 자신의 존재의 의미, 말하자면 스스로의 기량이 추궁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다마 미술대학으로 전직하고 얼마되지 않아 박사 과정이 신설되고, 나는 일상의 업무에 가세하여 회화과 학생들에게 박사 논문을 쓰게 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박향숙은 이런 과정에서 내가 처음으로 만난 학생이며, 그 소박하고 온화한 인품이 반영된 따뜻한 화풍에 의해 가장 인상적인 학생 중의 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박향숙의 박사 논문의 테마가 아동화라고 하면 누구나가 납득하는 것과 동시에 실제로 작가의 작품에서 또한 그것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논문이라고 하면 어려운 이론을 논하여 관념적으로 갑자기 비상하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화가는 그 나름대로 학술적인 단계를 밟으면서도, 아이들이나 교회, 가옥이나 풀꽃같은 일상의 풍경으로부터 결코 눈을 떼지 않는다. 그것은 아이들이 그들의 관심 범위 내 에서만 그들의 세계를 존재시키는 것, 그들의 진실은 거기 밖에 없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 의미로 박향숙이 그려내는 화면은 모두, 사람도 물건도 요컨데 삼라 만상이 그 위에 안주 할 수 있는<회화의 대지> 혹은 유토피아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렇다 치더라도 누구나가 자신을 잘 보이려고 과다한 자기연출에 매몰 해 가는 현대의 조금은 병리적인 상황 하에, 때로는 어린아이 같은 이 소박함을 화가는 어떻게 지속 할 수 있었을까. 그에 시사적인 예를 들자면, 작가가 자작과 아동화의 공통점으로써「드로잉적인 요소」를 들어「면에서 파악하는 것보다 선으로 표현하려고 하고 있다」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다마미술대학 박사 과정전 2005」도록 p. 36) 드로잉이라고 하는 것은 대상이나 주위에 대한 가장 재빠르고 직접적인 표현 수단이다. 이것을 어느 상황 속에 놓여진 존재, 정확하게는 현존재(Dasein)의 그래프라고 본다면 그 의미는 보다 확실해진다. 이것은 약간 오해를 일으키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불안한 긴장 관계 속에 놓여져 있는 아이(아니, 어른이라도 그렇다) 의 그림에서는 그럴만한 징조가 나온다. 그것은 그야말로 마음의 그래프를 보는 것과 같은 심전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박향숙은 긴장 관계가 없는 세계, 따뜻한 숨결로 사람도 물건도 감싸안고 어떠한 권력의 구성원리도 없이 모든 것이 평등해지는 특별한 장소, 마치 부드러운 모놀리스와 같은 몽상적인 세계를 그려내려고 하는지 모른다. 이런 의미로 그녀가 만들어 내는 비전은 약간 당돌하면서 가장 정확한 의미로써의 올오버이다. 박향숙의 독자적인 세계는 아득한 낙원의 기색을 남기는 혹은 상기시키는 그 곳을 향한 <가까움>의 원리라고도 해야 할 것이다. 그 곳에는 사람도 물건도 공간도 서열화해 가고, 인간적인 듯 하나 비인간적이며, 그런 의미에서 서구적인 선원근법의 편린도 없다. 그 곳에서는 전경을 이루는 아이들도, 그 옆의 풀꽃에 물을 주고 있는 중천에 떠올라있는 물뿌리개도, 뒷면 벽과 같은 언덕도, 하늘에 오르는 사다리도, 신기루와 같은 교회와 수목도, 곳곳에 깜박이는 별까지도, 동화책처럼 바로 위에서 납작하게 그려진 화단도, 어쨌든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마치, 같은 평면 위에 있는 듯, 혹은 대지에 뿌리를 내린 것 처럼 우리에게 가까운 것이다. 박향숙, 이 겸손하고 자기 주장이 적은 화가에게 있어서<가까움>이 얼마나 본질적인 것 인지는 최근작의 비눗방울 시리즈를 봐도 잘 알 수 있다. 보통은, 혹은 전통적으로는 비눗방울은 무상함의 상징이다. 사실, 무지개의 파편과 같은 그것은 너무 섬세한 것이며, 태어나서 곧바로 터져 사라져 버린다. 적어도 우리 어른의 상식에서는 비눗방울은 그러한 것이라고 믿어 버리고 있을수 있다. 그렇지만, 즐겁게 비눗방울을 불며 반짝반짝 한 눈으로 그것을 쫓는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아마, 그 하나 하나가 세상에 둘도 없는 것, 즉 우열도 상하도 원근도 없이 동등하게 바로 옆에 제각기 선명하게 늘어서는 것은 아닌 것인가. 그러므로, 이 순수한 화가는 본래 구면(球面)이어야 할 비눗방울들 속에 최대한의 <가까움>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빨강이나 파랑이나 노랑등의 단색의 원판으로써 비눗방울들을 압축시키고 도려내는 한편, 거기에 불규칙한 층을 만들어, 빛나면서 생동 해 갑자기 소멸하는 비눗방울 무리들의 약동감을 나타내려고 하고있다. 그 곳에서는 모든 것이 일체가 되고 가지각색의 빛의 구름이 되어 마치 깜박이는 것 같다. 어쩌면 지성의 근거라고도 해야 할 분절화를 싫어하는 박향숙의 그림을 “소박파” 한마디로 정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주기 바란다. 화가가 가슴에 꼭 껴안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런 것들 이야말로, 우리의 <근대>가 물질적 풍요의 환상에 쫓겨, 그 중심을 잃은 가치 체계로부터 추방 시킨 것들은 아닐까. 그 결과, 우리는 과연 실로 행복하게 되었는가. 온 세상의 굶주려 가는 아이들의 영상을 앞에 두고 단지 그것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이 포식을 행복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인 것일까. 이렇게, 근대인의 정신은 오로지 내향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내가 굳이 현대인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이 단어에서는 역사성이 결여 된다, 즉 아직껏 우리는 근대의 선단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박향숙의 예술의 최대의 매력은 이러한 음침하고 푸념이 많은 내향에, 비록 소박하다지만, 아니 오히려 소박하게 사무치는 것에 의해서, 일조의 빛을 비친 것에 있다. 길을 잃은 우리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은근히 비추어 준 것에 있다. 즉 <회화의 대지>는 그 얼마나 유토피아를 뽐내도 결국은 이 살기 힘든 지상과 통하고 있다. 박향숙의 유토피아성 그 자체가, 혹은 만물에 대한 원초적일 만큼 가까운 <가까움>그것이 실은 복잡 괴기한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이 되고 있다. 가혹한 현실에 작가 자신이 접하고 있기 때문이야말로 박향숙은 다음과 같은 실로 암시적인 몽상을 껴안고 있는 것일 것이다. 「밖에서 격하게 비가 내리는 날, 창 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의 집안의 따뜻함. 바깥 세상과는 격리되어 있는 적막함을 느끼게 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전술) 박향숙이 꿈꾸는 가혹한 사회의 피난소, 이 비밀의 공간과도 같은 <가까움>에 의해 유지된 농밀하고 따뜻한 회화를 보다 완벽한 모습으로 실현시키려면 현실과 회화를 준별하여 연관시켜주는 강인한 창의 존재가 꼭 필요할것이다. 창은 회화의 숭고한 비유인 것을 기억하고 있을까. 의외로 수수께끼에 쌓인 말투가 되어 버렸지만, <창>의 확정이야말로 화가로서의 지성이라고, 나는 제자에 대해 새로운 정진을 기대하는 바 이다.
다마미술대학 교수/후츄시 미술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