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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희: 컷팅 더 스프링 

최윤희 

 

네 개의 모서리를 초과하는 회화의 한시적 크기

안소연 | 미술비평가

 

 

작은 정사각형 모양의 캔버스에 매끈한 붓질의 흔적을 머금고 있는 색면이 시선을 사로잡는, 이 그림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제 형태를 가진 어떤 대상을 보고 그것의 한 부분을 화면 가득 차게 그린 듯한 이 그림은 무엇을 그렸는지에 대한 질문 보다는 어떻게 그렸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크게 유발한다. 말하자면, 그림의 형상이 무엇인지 모르는 데서 오는 시각적 강박 보다는 그림의 표면에 대한 불확실한 인식에서 오는 시각적 충동이 앞선다.

 

<명의 윗면>(2020)은 스스로도 그려진 대상의 원형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이미 까맣게 잊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제목이 지시하는 것은 명의 윗면이지만, 그것은 전체에 대한 부분을 지각하는 특정 시점과 그 순간의 감각에 대해서() 환기시킨다. 크게 두 개의 색조가 병치되어 일으키는 색의 대비와 그림의 가장자리를 향해 이동한 붓질의 매끄러운 질감이 추상적인 감각을 한껏 고조시킨다. 어떤 형상이 흐릿한 잔상처럼 미완의 형태를 완성하려는 시각적 강박에 의해 잘 짜인 사각의 모서리로부터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어느 순간에 다다르면 숨은 그림 같은 형상 찾기를 아예 망각하고 마치 움직이던 영상의 정지 화면인 것처럼 멈춰버린 장면이 극대화 하는 추상적인 감각에 금세 빠져들게 된다. <명의 윗면>에서 감지되는 찰나에 대한 이와 같은 자각은, 사실 그가 그리기의 행위 이전에 풍경과 정물 등이 바라보이는 임의의 장소에서 경험한 감각적인 촉발과 비슷하다. 최윤희는 한동안 밤 풍경에서 얻은 시각 경험을 그리기의 행위와 그림의 조형적 함의들로 변환하는 일련의 회화적 시도들을 보여왔다. 그는 이제 이라는 시공간을 특정하지 않고도 그것이 강렬하게 제시해주었던 회화적 순간들에 진입할 낱낱의 조건을 따로 떼어와 신중하게 다시 살핀다.

 

그의 여느 그림들 가운데 <명의 윗면>은 비교적 작은 크기에 속한다. 벽에 걸린 <명의 윗면>은 명백히 어떤 형상의 일부-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지만, 굳이 여기서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를 떼어서 갖다 놓은 것으로, 캔버스가 표면에 지탱하고 있는 색면의 유기적 구조와 정사각형 캔버스의 생김새가 자동적으로 연상시키는 모듈적인 기능 탓에 작은 그림으로서의 인상은 형태에 대한 미완의 불확실성을 전제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최윤희는 시각적 강박에서 비롯된 그러한 착시를 빠르게 회수하도록 재촉하지 않고, (오히려 이 절차를 충분히 겪은 후에) 천천히 시각적 사실에 이르도록 하는데, 이와 같은 시각적 경험의 수정과 재인식의 작용은 그림의 크기에 대한 감각을 달리 경험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를테면, 이 작은 그림은 네 개의 모서리 바깥으로 제 형태를 확장하여 전체에 이른다든가 퍼즐을 맞추듯 부분들로 이어진 전체를 구성하는 조형의 논리를 구축하지 않고, 단지 그림 안의 형상이 현실에서 지니고 있던 와의 3차원적인 거리감을 나타낸다. 그것은 3차원적 거리감을 캡처한 하나의 (원본) 이미지로서 비로소 점진적인 2차원적 확대와 축소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적어도 <명의 윗면>의 경우, 그만한 캔버스의 크기로 그려진 데에는 임의의 장소에 놓여져 있던 그 3차원의 형상이 (회화적 순간에 의해) 제 몸에 지니게 된 시각적 거리감 때문일 테고, 평면의 그림이 되어서는 이제 그것을 원본 이미지로 삼아 붓질의 해상도를 달리 하는 확대와 축소의 가능성을 재고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명의 윗면>이 촉발시키는 정서는 불완전한 형상과 애매한 가장자리의 크기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에서 비롯되다가, 마침내는 평면의 추상적 그림에 머물러 그것이 어떻게 보여지는가 하는 데 열중하는 시각적 충동 그 자체에 집중하게 한다.

 

최윤희는 ⟪Recording Pattern⟫(2019, OCI 미술관) 전시에서도 밤 풍경에 대한 경험을 매개로 하여 이와 같은 회화적 순간과 시각적 충동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바 있다. 가로의 길이가 약 4m에 가까운 (2019)은 가로 150cm 내외의 <움직이는 조각들>(2019)<판 위의 밤>(2019) 연작들, 그것 보다 더 작은 <구간 리듬>(2019) 연작들로 이어지면서 그림에 있어서 크기의 문제를 부각시켰다. 그는 밤의 어둠 속에서 반짝거리는 인공 조명들이 차창 밖에 지루하게 이어지는 난간들에 부딪치며 쉴 새 없이 평면적인 추상의 패턴을 연출하는 한시적인 순간에 주목해, 그것을 회화적 감각으로 변환시켜 놓았다.

 

밤 풍경만큼 매력적인 것이 또 있을까. 숱한 왜곡과 착시, 불확실함과 흐릿함이 밤의 두께를 한껏 키워내는 탓에, 밤은, 시간 없이 정지된 공간으로 존재한다는 초현실적 상상을 끝없이 부추겨왔다. 그러한 밤의 풍경에 최윤희는 시간(움직임)을 덧입혀 밤의 표면을 헝클고 나서 그대로 캐스팅 하듯 떠내 회화적 장면을 연출했다. 죽은 듯 적막한 밤 풍경을 감싸는 인공 조명의 깜박거림과 그 사이를 가로지르며 달리는 시선의 움직임이, 결국 불확실한 어둠의 두께에 은폐되어 있던 공간감을 드러내고 이동하는 시선에 의해 시간이 훑고 간 어떤 질감들이 허공인지 망막인지 어딘가에 묻어나 회화적 순간의 절정을 포착해낸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체험된 한시적인 회화의 순간을 곧 30 x 21 cm의 작은 종이 보드 위에 물감의 색과 빠른 붓질을 이용해 단지 그 시간공간의 중첩된 이미지에 대한 감각으로 불러오려 했던 모양이다. 시·공간()의 이미지로 밤 풍경으로부터 끌어온 추상적 형상은, 바로 그 회화적 순간을 관통하여 회화의 조건을 하나 둘 구성함으로써 회화에 대한 경험으로 온전히 전이되는 것이다. 이때, 최윤희는 이미 신체에 의한 시공간적 경험이 회화적 경험으로 변환된 상태에서, 시공간에 대한 감각을 캡처한 원본으로서의 드로잉을 점차적으로 (불가능한 데까지) 확대해 봄으로써 거리감과 움직임을 일련의 패턴/원형으로 만들어 복제 가능한 크기까지 끌고 가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번 전시 제목으로 그가 제시한 “Cutting the spring”이라는 말에, 나는 네 개의 모서리를 초과하는 회화의 한시적 크기라는 글 제목을 붙였다. <위로 떠서, 떠올린다>(2020)<바로보기>(2020)는 서로 5~6 cm 정도의 크기 차이를 선명하게 보여주는데, 그 나란한 대비가 화면의 점진적 확대와 축소를 강하게 환기시키면서 원본의 크기가 스스로 달성했던 한시적인 거리감을 회화의 모서리가 함의하는 역동적 힘에 기대어 그 한계마저 초과할 수 있는 추상적 형상의 자율적 현전으로 나타내 보려 한 것 같다. 상상해 보건대, <바로보기>가 회화적 순간의 마주함을 가늠케 한다면 <위로 떠서, 떠올린다>는 회화적 조건을 수립한 후 반복되어진 회화적 경험을 재차 환기시킨다는 점이다. <가벼운 움직임들>(2020)<떨어져 나온>(2020)에서는, 동일한 상상에 기반해 좀 더 명시적인 움직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최윤희는 과거의 밤 풍경을 대신해 물의 표면에 주목하여, 그의 표현대로, 물결이 일렁이는 가벼운 수면의 한시적 움직임의 순간들을 포획했다. 익숙한 장소에 놓인 그의 몸과 한시적 움직임을 나타내며 한껏 가벼워진 수면이 한 시공간에서 우연한 감각을 주고 받게 되는 찰나의 순간에 대해, 최윤희는 그러한 소소한 사건이 회화적 순간을 맞이해 회화적 경험으로 변환되는 일련의 과정을 살피며 그 가능성을 탐색한다. 이렇듯 포획된 가벼운 움직임들은 사건의 시공간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회화적 감각을 조율하는 사색의 과정을 통해 일련의 무게와 크기와 방향과 깊이에 대한 감각을 지닌 추상의 회화로 변환되어 가는 것이다. 어느 순간에 이르러 특히 그는 이 추상적인 성질의 조형에 몰두함으로써 회화적 순간을 포획한 원형의 틀을 초과할 만한 회화적 경험의 가능성에 대해 자각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상승하는 리듬>(2020)<옮겨가는 자리>(2020)는 물의 표면에서 발견한 한시적인 조형성으로, 앞서 살핀 <가벼운 움직임들> <떨어져 나온>처럼 최윤희 특유의 경험적인 시각을 나타낸다. 바람에 일렁거리는 물결이 수면 아래의 깊이를 묵직하게 봉인하고 있던 물의 표면을 어느 순간 곧 상승하여 증발해버릴 것처럼 가볍게 부유하는 움직임으로 변환시켜 놓듯, 이러한 감각을 그는 회화의 추상적인 차원으로 옮겨 놓는다. 한편, <오르락 내리락 하는>(2020)과 함께 <명의 윗면>을 다시 보면, 이 단조로운 형상들이 함의하는 시점과 거리감이 유독 어떤 추상적인 조형의 운동성을 강조한다. 언뜻 스프링 구조의 형상이 중첩되어 보이는 이 그림에서는, 그것의 오르락 내리락 하는 운동성을 예외적 시점에서 사물의 형태와 실제 방향성을 강조하지 않고도 새로이 구성한다. 그런 의미에서 <명의 윗면> 또한 그 본래의 형태가 지니고 있던 성질이 무엇이었는지는 상관 없이 이 시점이 포착하고 있는 추상적인 형상에서 곡선으로 미끄러지는 선들과 고르게 그 선을 반복하며 칠해진 신중한 붓자국과, 또 하나, 그러한 과정에서 겹쳐진 분홍과 파랑의 애매한 섞임이 화면의 운동성을 더욱 크게 배가시킨다.

 

그렇다면, 저 작은 종이 그림은 무엇인가. 최윤희가 새롭게 시도한 (정말) 작은 종이 그림은 많은 질문을 유도한다. 임의의 불규칙적인 형태, 부분으로 떨어져 나간 듯한 크기, 그것을 지시하는 구체적인 언어(제목) 등 이 모든 정황들이 어떤 회화적 목표를 두고 공존할 수 있을까. 그가 한동안 몰두했던 것처럼, 밤 풍경에서 인공 빛이 강하게 조명하는 한 순간의 폭발적인 시공간적 경험을 회화로 떼어 와 추상적인 시각적 충동을 표현하고자 하는 시도를 보여왔는데, 그 연속에서 극대화된 거리감을 드러내며 허공에 떠 있는 저 작은 종이 그림의 정체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묻지 않을 수 없다. <4개의 손잡이가 달린 의자>(2020), <걸리는 자세>(2020), <두꺼운 통, 오래된 통, 드러운 통>(2020), <등의 모양>(2020), <뜨거운 고리>(2020), <바람이 통과할 때>(2020), <왼쪽 면만 보기>(2020) 등을 여러 정황에 비추어 살펴보면, 다수의 단서가 떠오른다. 밤 풍경에서 인공 빛이 만들어낸 한시적 장면처럼, 최윤희는 일련의 작은 종이 그림에서 풍경의 여러 장면에서 한시적 크기의 형상을 캡처해낸 것이다. 그는, 빛에 의해, 그림자에 의해, 중첩된 형태들에 의해, 움직임에 의해, 배경의 여러 조건들에 의해, 임의의 한시적 크기를 가진 형상이 경험되어지는 한 순간의 장면을 포착한다. 그것은 와 그 형상이 신체적으로 경험하는 크기에 대한 현전을 말하는 것으로, 일종의 거리감을 원본에 포함시킨 한시적 크기의 형상에 대한 자율성을 모색한다.

 

<어디로부터 오는 것>(2020)이 함의하는 그림의 속내는, 일련의 논의들을 포괄한다. 그림 그린 이가 스스로 훈련시킨 추상적인 감각은, 그리는 과정에서 끝없는 형상의 출현을 도모하면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표현된 것과 표현되지 않은 것에 대한 시각적 충동을 통해 이 추상적 형상의 출처에 대한 회화적 경험을 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