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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ogon Affair 

고낙범 / 노순택 / 양아치 

 

알로곤, 무리수의 상상력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약 2600년 전 활동했던 수학자이자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만물이 수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고, 수학을 통해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에게 사물의 본질은 물질이 아니라 추상적 원리, 즉 ‘수’였다. 그는 정신과 물질, 조화와 불화, 선과 악을 명확히 구분함으로써 그리스 사상에서 이원론을 창시했다. 세상에 대해 차고 넘치는 호기심과, 그 호기심을 해결해 나갈 만큼 명석했던 피타고라스는 진동하는 현의 길이와 그 현이 내는 음의 높이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찾아내 조화수열을 발견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두 현의 길이가 2:1, 3:2, 4:3과 같이 간단한 정수비일 때 그들이 내는 두 음이 상쾌한 화음을 만든다는 사실도 알았다. 수학과 음악 사이의 이러한 조화를 자신의 세계관으로 일반화시킨 그는, 세계의 질서가 수적인 비례 관계에 있듯이 천체의 조화로운 질서도 그런 비례관계에 의존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를 추종하는 피타고라스 학파는 그들의 상징으로, 정오각형을 이용하여 만들 수 있는, 신비로운 규칙과 황금 비율이 가득한 별을 선택했다. 그의 최고업적은 바로 피타고라스의 정리다. 직각삼각형의 직각 사이에 있는 두 변의 길이를 a, b, 빗변의 길이를 c로 했을 때, 그들 사이에 a + b = c 이 성립한다는 이 원리를 발견, 증명해낸 결과 사람들은 직각을 쉽게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직각은 건물을 짓는데 아주 유용한 원리였기 때문에 이 정리는 문명건설에 유익했다. 그는 이 정리를 ‘증명’하는 과정에서 정수의 비로 나타낼 수 있는 수인 3/2, 3/6 등의 유리수를 발견하였고, 이 수로 표현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곧, 단위 길이를 갖는 정사각형의 대각선과 그 길이가 같은 선분의 끝점에 대응하는 유리수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우리가 오늘날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직각이등변삼각형의 빗변과 밑변의 비, 즉 정사각형의 대각선 길이 의 비인 √2를 발견하고 만 것이다. 만물의 이치를 수로 설명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이들에게 그들이 정의내린 수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즉, 두 개의 정수비로 나타낼 수 없는 수는 ‘수’로 용납될 수 없었다. 무리수의 존재는 그들의 믿음을 뿌리부터 흔들었기 때문에, 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피타고라스는 이것을 거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무리수를 "입으로 말할 수 없다", 또는 “비율이 아니다”라는 의미의 ‘알로곤 Alogon’이라 칭하고 연구대상에서 제외했을 뿐 아니라 이 사실을 알고 있는 피타고라스 교단의 어느 누구도 절대 외부에 누설할 수 없도록 그 존재 자체를 봉인했다. 그러나, 전설같이 전해져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교단의 히파수스가 결국 이 비밀을 누설하였고, 그 벌로 영원히 침묵하도록 살해됐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결국 무리수는 세상에 알려지고 말았다. 피타고라스가 감추고 싶어 했던 비밀인 무리수의 존재가 또 다른 세상으로 가는 문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비율’이 아니기에, ‘입에 담아서는 안 될’ 이야기지만, 이것은 다만 자신의 욕망을 위해 숨겨두었을 뿐, 결국 때가 되면 수면위로 올라와서 모습을 드러낼, 세상을 향한 발언의 한 토막이었다. 생각해보면, 많은 것들이 한 때는 비밀이었다. 계절이 바뀌는 것도, 해가 뜨고 지며 밤낮이 바뀌는 것도, 그 이유를 알 길 없었던 인간에게는 신만이 아는 오묘한 신비, 인간의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세상의 이치였다. 지구가 공처럼 둥글 뿐 아니라 심지어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들이 한 때는 목숨마저 앗아갈 만큼 무거운 비밀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지금 세상이라고 다를까. 우리 주변에서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명명백백한 상황, 사실들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알아서는 안 될 일인 것처럼 꽁꽁 싸매두거나, ‘연막작전’을 펼쳐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도록 하는 일이 발생한다. 음모와 비밀이 넘실대는 이 세상에, 눈 뜬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가 되는 경험을 종종 하지만 그런 일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흘러가듯 살아가는 대부분의 ‘우리’들이 있다면, 그 내막을 알아도 진실의 무게 때문에 침묵하거나 침묵할 수밖에 없는 누군가가 있고, 또 히파수스처럼 그 침묵의 카르텔에 균열을 일으키는 어떤 누군가가 있을 터. 이번 전시는 언제나 불편한 ‘알로곤’이 있는 현실 속에서 ‘히파수스’처럼 살아가는 작가들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했다. 대상과 목적, 방법은 다르지만, 고낙범, 노순택, 양아치는 암묵적 침묵의 세계 혹은 실체를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드러내는 작가들이다. 논리적 세상과 이성적 인간을 수평과 수직의 이미지로 그려왔던 고낙범이, 다른 방향을 꿈꾸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선은 비스듬하게 뻗어나갔다. 신비함과 완전무결의 의미를 담고 있는 숫자 5와 사선이 만나, 서로 수평을 이루지 않는 다섯 개의 선으로 이루어진 오각형이 탄생했다. 황금비율의 총체인 정오각형을 제외하고 그려나가는 그의 오각형은, 사선의 속성이 강조되어 훨씬 불안하고, 역동적이며, 지구를 지배하는 절대권력, 중력으로부터 자유롭게 부유하는 흐름을 만들어낸다. 그 형상은 우리의 기하학적 상상력을 자극하여, 영토를 벗어나 우주로 팽창하는 통제할 수 없는 에너지를 꿈꾸도록 유도한다. 오각형의 나팔꽃 가운데를 관통하는 구멍 속에서, 목에서 항문까지 인간의 몸을 관통하는 구멍 속에서, 우리는 이성에 의해 지배받지 않는 어떤 새로운 세계로 나갈 수 있는 통로를 찾아낼지도 모른다. 그는 구조와 불규칙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 이율배반적인 상황의 삐걱거림을 통해, 인식 너머에 있는 어떤 세계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노순택은 평택 대추리의 황새울 들녘에 서 있는 하얗고 둥근 야릇한 공의 정체를 찾아 나선다. 마을 사람 그 누구도 이 흰 공의 정체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서 작가는 흰 공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그 정체를 추적해나간다. 이 흰 공은, 대추리 마을의 “사람들, 곡식, 새, 꽃, 나무, 풀, 기러기, 가창오리, 똥개, 황소, 고양이, 물, 철조망, 집, 트랙터, 자동차, 달, 구름, 깃발”과 함께 그의 카메라 안으로 들어왔다. 여러 네트워크를 통해 알게 된 이 공의 정체는 ‘레이돔’(radar + dome = radom) 이었다. 내부와 외부의 압력을 모두 훌륭하게 막아낼 수 있는 이상적 형태인 구의 모습을 한 레이더는 정보 기술력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현대전의 전투기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다. 미군의 통신감청 핵심기지인 평택에 솟아 있는 레이돔의 역할이 무엇일지는 주변정황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바, 작가에게 빛나는 흰 공은 “한반도의 안보와 정보를 손에 쥐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켜나가는 미국이란 존재의 다른 이름”이다. 그의 「얄읏한 공」 시리즈에서 보이는 레이돔은 주위의 풍경과 묘하게 어우러지며 스스로의 존재를 은폐하거나, 부각시키고 있고, 누구를 위해, 왜 살던 땅을 빼앗기고 쫓겨나야만 하는가의 정당성을 의심하고 그 부당함을 호소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묵살한 채, 마치 들리지 않는 양, 모르는 척 외면하고 있다. 미군기지 이전으로 지금은 역사가 되어버린 대추리 현장사진 속에서 흰 공을 발견하며, 우리는 그 가려진 진실에 조금씩 다가선다. 남한과 북한의 사이라기보다, 남한도 북한도 아닌 그 어디, 영토 없는 가상국가 미들코리아를 세운 양아치는 가상인물 ‘저격수 차지량’에게 ‘루머건’을 건네주었다. 그의 총은 사회적 개입을 위해 필요한 물건들을 제작하는 ‘김씨공장’표 물건이다. 기존에 '기억을 잃어버리는 약', '가미가제 헬멧' 등과 같은 사회 개입용 물건들을 제작한 바 있는 김씨공장은 미들 코리아에 살고 있는 김일수와 그의 두 아들 김이수와 김두수, 딸 김영이 50년째 운영하고 있다. 이 공장을 대표하는 제품은 정교한 수공작업을 거쳐 탄생하는 바이크다. 인공위성 탑재가 가능하고, 미사일도 장착할 수 있는 범상치 않은 물건을 타고, 미들 코리아에 국적을 등록한 가미가제 라이더들은 파괴하고 싶은 시스템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 나간다. 김씨공장은 이처럼 가미가제 라이더나 차지량과 같은 개인의 존재를 지원하며 개인과 개인을 이어주는 네트워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김씨공장의 루머건으로 차지량은 소문을 발사하며 세상을 교란시킨다. 그의 ‘저격’은 바로 ‘시스템에 대한 저격이고, 시스템의 안정성에 대한 우리의 심리적 연결고리를 해체하는 전략’이다. 루머건으로 사회, 시스템에 개입하는 차지량의 활약 속에서 우리는 ‘사회적 소실점’으로서 여전히 한 몫을 하고 있는 개인 존재를 확인한다. 존재자체가 기존의 국가, 정부, 경제, 사회 시스템의 파괴하는 이 곳 미들코리아에서 행동하는 개인들은 ‘여기’에서 꾸고 싶은 꿈을 실천하고 있다. 무리수의 상상력으로 세상의 ‘알로곤’을 끄집어내는 이 세 작가는 안팎으로 견고한 구의 어딘가에 균열을 내거나, 새로운 구를 만들거나, 아니면 또 다른 그 무엇을 만들어 나간다. 그들의 작업을 통해 ‘실체’에 관심을 갖거나, 관심을 행동으로 옮기거나, 아니면 그냥 스쳐지나가거나, 무엇이 되었건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