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화가 오윤을 생각하며 오윤이 죽었다 야속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는다 나이 사십에 세상을 뜨며 친구들이 둘러앉아 슬퍼하는 걸 저도 보고 싶지 않겠지 살 만한 터를 가려 몇 개의 주춧돌을 부려놓고 잠시 숨을 돌리며 여기다 씨 뿌리고 여기다 집을 짓고 여기다 큰 나라 세우자고 그가 웃으며 말하는 것처럼 아직도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 나의 믿음이다 그는 바람처럼 갔으니까 언제고 바람처럼 다시 올 것이다 험한 산을 만나면 험한 산바람이 되고 넓은 바다를 만나면 넓은 바닷바람이 되고 혹은 풀잎을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 혹은 칼바람으로 우리에게 올 것이다 이것이 나의 믿음이다 그가 칼로 새긴 언어들이 세상을 그냥 떠돌지만은 않으리라 그의 주검 곁에 그보다 먼저 와서 북한산이 눕고 그리고 지리산이 누워 있다 여기다 큰 나라 세우려고 그는 서둘러 떠났다 1986.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