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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장섭

 

 

손장섭은 1941년 전남 완도의 고금도에서 태어났다. 수산물이 많이 나는 청정해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때의 마을 풍경과 추억이 작품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물감을 처음 접해본 것은 나룻배를 타고 놀러 간 약산도 외갓집에서였다. 이모의 수채화 물감에 호기심을 느껴 몰래 훔쳐다 논에다 풀어보며 놀기도 했다. 손장섭은 국민학교 시절부터 수채화에 흰색 물감을 쓰길 좋아해 미술 선생님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수채화에 흰색을 사용하는 것은 거의 금기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물의 농도만을 조절해 투명하게 그려야 하는 수채화에 일부러 흰색 물감을 섞어 탁하지만 부드러운 자신만의 색을 냈다. 이러한 고집스러운 습관이 꾸준히 이어져 손장섭 특유의 작업 방식으로 정착했다. 학창 시절 선생님들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는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자기 나름대로 그림을 그리는 학생들이 있는데, 손장섭은 자신이 후자에 속했었다고 회상한다.

손장섭이 아홉 살 되던 해에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을 피해 온 가족이 익산으로 피난을 갔다. 아버지가 미군 부대에 노무자로 끌려간 후로는 어머니가 익산과 군산을 오가며 생선 행상을 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1951년 아버지의 부대를 따라 대전으로 옮겨갔다. 휴전 후, 손장섭의 가족은 서울로 이사했다. 서울 아이들의 공부를 따라가기는 어려웠지만 그림에는 자신이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손장섭은 미술로 이름이 있는 서라벌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서라벌고등학교 재학 당시 손장섭의 작품에 대해 이구열 평론가는 수채화로서는 좀처럼 얻기 힘든 터치로서 조형적인 처리에 성공했다며 투명과 불투명의 회갈색 분위기의 나이프를 사용하여 액센트를 주고 있다고 호평한 바 있다. 고등학교 미술부 규모가 150명 정도로 컸다. 이 시기 미술부 동기인 김종일, 유택수와 함께 《삼우전》(1960, 중앙공보관)을 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되던 해에 4.19 혁명이 일어났다. 데모 현장에 나가 덕수궁 대한문 근처 골목에서 학생들이 뛰쳐나오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린 것이 〈사월의 함성〉(1960)이다.

1961년에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경제적 이유로 학업 포기를 종용하는 아버지 의사에 반대하여 단신으로 서울에 남았다. 생활비 충당을 위해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입시용 석고상을 만들어 화방에 납품하는 등의 일을 했다. 1963년 군에 입대했고 1965년에는 월남 파병에 지원했다. 학자금을 마련할 목적으로 전투 수당을 꼬박꼬박 모아 친구에게 송금했으나 친구가 돈을 모두 소진해버려 결국 홍대에 복학하지 못했다. 제대 후에는 교학사, 삼성출판사, 동화출판공사, 지식산업사에 취직해 일했다. 1978년 동아일보사에서 《동아미술제》 창설을 맡아 진행하기도 했다. ‘새로운 형상성이라는 가치를 전면에 내걸고 삶의 풍경과 역사 의식을 형상화한 사실주의적 작품들에 주목했다. 1980년에는 손장섭, 주재환, 오윤, 김정헌, 성완경, 윤범모 등의 미술인이 모여 현실과 발언을 결성했다. 1981년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로 전향하였으며 1985 120여 명의 미술가와 함께 민족미술협의회를 창설하여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1986년 봄에는 기금으로 인사동에 그림마당 민이라는 전시장을 마련하여 민중미술 화가들을 주축으로 전시를 열었다

손장섭은 1970~80년대에 신문회관, 그로리치화랑 등 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최근에는 금호미술관에서 《자연과 삶, 손장섭전》(2003)을 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도쿄 동경도 미술관 등 국내외 여러 기관에서 열린 다수의 전시에 참여했다. 2회 민족미술상(1990), 10회 이중섭미술상(1998), 15회 금호미술상(1998) 등을 수상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